로고

전주완산교회
로그인 회원가입
  • 예배와말씀
  • 주일설교말씀
  • 목양칼럼
  • 예배와말씀

    평신도가 사역자가 되는 교회,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지는 교회

    목양칼럼

    평신도가 사역자가 되는 교회,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지는 교회

    [23-11-05] 법의 이용이냐? 적용이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전주완산교회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58회   작성일Date 23-11-03 22:31

    본문

    요즘의 정치인들이나 고급 공무원들의 행태를 보면 법을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법을 이용해서 정적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많음을 봅니다.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대신 자신의 문제와 죄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정적을 제거하는 사람들을 ‘법 기술자’ 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를 한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말에 태워서 주막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은 사랑하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막상 사랑을 베풀어야 할 순간에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 강도 만난 사람은 거의 죽어가던 사람, 즉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은사람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그들이 생명처럼 존중하는 정결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가 평소 자신을 멸시하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조건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찾아가서 끝까지 돌보아주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긴다’ 는 뜻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는 [레헴]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자기 몸에 일 년을 품고 해산할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평소 사랑을 늘 말하고 살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정결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랑이 가장 필요할 때 이 사랑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의 진정한 본질은 사실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문자에 매여서 사랑을 회피하였고 그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신앙생활 할 때 우리도 어떤 법과 원칙을 핑계삼아 사랑을 회피한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교회 안에 정해진 원칙과 규례 등을 잘 지켜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원칙을 핑계 삼아 원칙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사랑을 방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원칙을 초월해서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많은 교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갑자기 방문하는 선교사님들, 나그네들,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어떤 기관이 눈에 보일 때 자식이 죽어가는 엄마의 심정을 가지고 내 생각과 관념을 초월해서 무 조건적으로 지체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대 우리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입가 될 것니다. 우리가 법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그 법을 내게 적용함으로 사랑을 흘려보내는 생명이 약동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